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톡톡 튀고 신선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최근에 읽은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도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한 단편 모음집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브로콜리 펀치도 그에 못지않네요. 환상과 현실 사이 어느 지점에서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는지 젊은 작가들은 잘 아는 듯합니다. 뻔하지 않은 신선한 소설들이 많이 나와서 기쁘네요. MZ작가들의 성장이 기대됩니다. 저는 누군가 2022년 베스트 책으로 이 책을 뽑았길래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8편의 환상 단편 소설 모음집 브로콜리 펀치입니다.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문학과 지성사 / 2021
p. 304
빨간 열매
"아버지는 자기를 화장하고 나면 남은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었다."
첫 소설의 첫 문구입니다. 주인공은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무심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결국 실행에까지 옮깁니다. 화훼단지에서 볼품없는 빼빼 마른나무 한 그루를 사서 유골함에 흙과 섞어 심어버린 것이죠. 나무는 혼자 무럭무럭 자라 새 잎도 올라오고 줄기도 굵어지던 어느 날 "물."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인공은 깜짝 놀라지만 뭐야 이러면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랑 똑같다며 투덜거리며 나무가 된 아버지를 돌보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깜짝 놀랄 초자연적인 상황 앞에서 주인공이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이 소설은 리얼리티를 확보한 현실세계로 인식되더라고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쩐지 있을 법한 이야기로 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른 단편들도 다 이런 분위기입니다.
돌이 자꾸 말을 걸어 돌과 친구가 된 남자, 5년 전에 죽은 남자친구가 손톱에 들러붙어 불현듯 찾아오기도 하고, 어느 날 투명한 젤리 상태가 된 여학생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정세랑 작가를 좋아하는 데 조금 비슷한 농도의 판타지입니다. 현실 세계에 판타지 한 스푼 추가한 정도의 소설들이라고나 할까요. 적당히 환상적이면서 현실감을 잃지 않습니다. 첫 문장만으로도 흡입력이 생기더군요. 가독성마저 좋아 금방 읽게 되고, 시간도 훌쩍 흘러가 버립니다.
브로콜리 펀치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단편에서는 복싱선수인 남자친구의 오른팔이 브로콜리가 되어 버립니다. 주인공은 그냥 담담하게 '병원 가자'라고 말을 합니다. 브로콜리 펀치가 진짜 브로콜리가 된 손으로 하는 펀치라는 뜻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저만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러고 저절로 이 소설에 빠져들게 됩니다.
나를 다시 안온한 상태로 되돌리는 역할을 맡은 어떤 기관이 열심히 일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원준은 너무 많은 괴로움을 자꾸만 억지로 삼키다 보니 그 기관이 고장 난 게 아닐까.
그래서 괴로움을 그대로, 그대로 받아들이다
결국 어느 날 아침 별안간 브로콜리가,
그렇다면 원준의 손이 낫고 나면 원준은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이렇게 비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일들이 책 속에서는 별일 아닌 듯 늘 그래왔듯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데 나만 모르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생겨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착각은 나에게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소설은 <이구아나와 나>입니다.
이구아나와 나
이구아나는 자기가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곧 죽을 것 같다며, 죽기 전에 소원인 멕시코에 가고 싶으니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말을 합니다.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 멕시코에 있는 이구아나의 천국으로 가겠다며.
동해안에서 멕시코 해변까지는 만 하고도 천오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이구아나는 주인공이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에 데려다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결국 수영으로 멕시코에 도착합니다.
읽는 동안에 멕시코의 강렬한 태양과 해변이 떠오르면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저는 여간해서 여행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며 집이 너무나 좋은 집순이입니다만, 책을 읽으면 항상 가고 싶은 곳이 생깁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겠죠.
사고의 확장과 간접 경험, 동기 유발 같은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습니다. 특히 소설에서 더욱 많이 받습니다.
처세술이나 실용서적은 어쩐지 읽고 나면 그뿐이라 기억에 남지 않는데, 소설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한줄평 : 정세랑 월드에 이은 이유리 유니버스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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