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 정혁용 장편소설
제가 책을 읽을 때 책 날개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요, 요즘은 몇 장 읽고 재미없으면 안 읽는 마인드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강박적인 인간인 제가 재미없다고 중도에 책을 덮는 일은 정말 큰맘 먹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강박 중에 하나라도 고쳐보자 해서 해봤는데 뭐랄까 약간 속이 시원한 듯도 하면서 책에 죄책감도 들면서 묘한 감정입니다. 대신 책 읽으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는 일도 꽤나 고역이거든요. 취미생활인데 그냥 나 즐거우려고 하는 일에 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안 그래도 스트레스받을 일은 쌔고 쌨지 않습니까? 재미없는 책은 이제 안 읽고 살랍니다. 책은 무수히 많고, 내가 뭐라고 독서편식 고쳐서 어따쓰려고. 책이라도 좋아하는 책만 읽자 주의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영화에도 적용했더니 영화를 거의 안 보고 있습니다. 영화 보는 일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저 남들이 다 보니까, 누가 재미있다고 하니까, 천만영화라니까 따라 본 일이 많습니다. 책도 영화도 보고 싶은 것만, 보다가 재미없으면 과감하게 중단하기.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실천 중입니다. 약간 자유롭네요.
이 책은 제가 아무런 정보 없이 빌려온 책인데요, 첫 몇 장만 읽다가 금방 빠져든 책입니다.
침입자들
정혁용 장편소설
다산북스, 2020
p. 344
띵언모음집 이 정도면 인간관계 처세술인가
주인공은 막 서울에 도착한 마흔다섯의 남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여벌의 옷과 9만 8천 원이 전부인.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주인공의 시작은 어쩐지 불편한 편의점의 주인공을 닮아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뵈는 중년의 남자라는 점이요. 다른 점이라곤 불편한 편의점의 주인공은 기억 상실인 거고, 이 책의 주인공은 과거를 밝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숙소가 제공되는 일자리를 찾습니다. 그러다 시작한 택배일. 행운동 담당이라 행운동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남자는 책을 많이 읽은 듯 중간중간 책 소개가 나옵니다. 제목조차 생소한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팩토텀>, <달리는 폭슬리> 같은 책도 나오고, 도스트옙스키나 <인간의 굴레>, <손자병법> 같은 유명한 작품도 등장합니다. 음악과 영화에도 일가견이 있어 보입니다. 작가는 이 책은 표절이 아니고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 영화, 미드, 팝에 대한 오마주라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하는데 다 알아차리는 분이 계시다면 정말 부럽습니다. ㅎㅎ
남자의 자존심이라 이건가요?
그런 건 평생 가져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상대가 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주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하고.
남자의 삶의 모토인 듯 내내 명령을 하는 자들에게는 끝없이 반항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지경에 와서조차 끝까지 일관적인 모습은 이 남자 뭐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왠지 과거에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다.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멋있죠.
하드보일드고 펄프 픽션이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거야. 난 이쪽 소설을 읽는 게 취미니 알고 있는 거고. 무식이란 건 알아야 하는 걸 모르는 거지 몰라도 되는 걸 모른다고 해서 무식하다고 하진 않아.
참나, 하드보일드가 뭐람. 몰라도 되는 걸 모르니 무식하지 않다고 했지만 괜히 무식한 기분이 듭니다. 이번 기회에 유식해져 보겠습니다.
하드보일드 :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수법
펄프픽션 : 저질 펄프지에 인쇄한 야한 선정적인 제재의 소설
으흠. 그렇군요. 대충 느낌으로만 아는 단어들은 설명하려고 보면 사실은 모르는 단어였단 걸 알게 됩니다.
역시 책을 읽다 보니 조금 유식해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미술과 영화를 사랑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죠.
실제 하기도 했고.
그중에 일부가 그렇죠.
재능은 없었어요.
안목만 가진 사람들의 비극이죠.
이 남자의 대화 화법이 재밌습니다. 상대방은 자주 열을 받고 화를 내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재밌어서 웃게 됩니다. 위트 있지만 시니컬하고 초지일관 시큰둥. 세상일에 관심 없고 주변일에 관여도 안 하고 싶지만 무언가 초월한 듯한 이 남자에게는 끊임없이 이상한 사람들이 엮입니다. 매일 담배 한 개비씩 빌려가는 춘자라는 여성 하고도. 유명한 경제학자였지만 이제는 구부정한 노인이 되어버린 교수하고도. 콧물을 흘리고 다니는 다 큰 남자 마이클도. 코카인 바에서 일하는 제니하고는 악연이고. 재벌 회장님에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는 투피스 여성, 자신도 모르게 경찰의 덫이 되기도 하고. 사건은 계속 이어지고 커지다 결국 터져버립니다. 내용은 쉴 새 없이 빠르게 전개되어 흘러가다 마지막에 남자의 이니셜이 나오고 끝이 납니다. 과거의 단서가 꼴랑 알파벳 K하나뿐인 거죠. 이쯤 되니 시리즈물인가 보다 합니다. 검색해 보니 다음 책도 있더군요. <파괴자들>. 얼른 다음책 읽어보려고요. 도서관 가려다 보니 밀리의 서재에도 있습니다. 오예.
책은 정말 재밌습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빌린 책이 재미있으면 수지맞은 기분이 들어요. 재밌다고 소개받은 책들은 일단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무 기대 없던 책이 마음에 쏙 드는 일은 자주 없거든요. 무려 이번달 베스트로 뽑을 정도입니다. 아직 한 달의 절반도 안 지났지만. 작가는 자신의 취향인 책, 영화, 음악들을 이 소설에 녹여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취향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저는 부럽더라고요. 내 취향은 이제 겨우 핸드크림 정도 알아차렸거든요. ㅎㅎㅎ 언제쯤 이거 내 취향이야라고 자신 있게 소개하는 것들이 늘어날까요? 하루키처럼 좋아하는 티셔츠로 책 한 권 뚝딱. 음반으로 책 한 권 뚝딱. 달리기로 책 한 권 뚝딱. 이렇게 책이 뚝딱뚝딱 나올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 취향을 긁어모아 포스팅 가득 써 볼 날이라도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줄평 : 이 책은 연작입니다. 저는 어서 다음 책 읽으러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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