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장편소설
이슬아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그의 첫 책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통해서였습니다. 고소득 아르바이트인 누드모델을 하게 된 경위, 그런 딸에게 고급 가운을 선물하는 엄마 복희 씨. 강렬했습니다. 엄마를 복희 씨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딸이나 누드모델로 돈을 버는 딸에게 좋은 가운을 선물하는 엄마나. 제가 가지고 있던 모녀의 편견을 제대로 전복시켜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뒤로 이슬아 작가의 책은 계속 찾아 읽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필집, 산문집, 서간집, 인터뷰 모음집, 이슬아 글방 책. 가장 최근 읽은 아무튼 노래까지요.
이번 책은 이슬아 작가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장편소설
문학동네 / 2022
p. 313
가부장을 전복시킨 가녀장이 왔다
작가 이슬아와 이름이 같은 주인공 슬아는 가부장으로 똘똘 뭉친 할아버지의 총명한 손녀딸로 태어났습니다. 자라면서 본 할머니는 딱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고, 며느리인 엄마를 보면 고생길이 훤했고요. 슬아는 커서 할아버지 같은 사장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30년 후 정말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직원으로 둔 출판사 사장님이요.
엄마 복희씨는 정직원이고 아빠 웅이보다 월급을 두배로 받습니다.
"엄마의 노동이 아빠의 노동보다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야."
시아버지와 살 때도 복희 씨는 장을 보고 냉장고를 경영하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복희 씨의 노동은 가녀장의 시대에 비로소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받습니다. 대체불가하며 요리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요. 나를 인정하고 대접하는 사장님을 위해 몸을 아끼는 직원은 없을 것입니다.
모부들은 성공한 딸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녀장이자 월급과 보너스를 챙겨주는 사장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힘껏 모십니다.
그들의 모습엔 조금의 비굴함도 없으며 심지어 초연하기까지 합니다. 성공한 애는 달라. 그들의 유행어를 중얼거리며 거들먹거리는 슬아를 비아냥대기도 하고요. 가부장 따위는 태초부터 없었다는 듯 가녀장의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갑니다.
근무시간엔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고, 각자의 업무에 열중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가면서요.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리고 혼동이 오죠. 이건 실화인가 소설인가. 슬아, 복희, 웅이 실존 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그대로 나오고 출판사 이름만 살짝 다를 뿐 누가 봐도 이슬아 작가의 생활 같거든요. 어린이 글방을 운영하고 매일 마감을 하고 강연을 하고 책을 내는 것들이요.
마지막 작가의 말에 모부들은 책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든지 변형 왜곡해도 좋다는 허락으로 나온 캐릭터라고 밝히지만 않았다면 실제 생활이라고 믿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부들아, 난 다 썼다."
소설 속 슬아는 매일 마감에 쫓기는 작가입니다. 마감에 쫓겨 고통의 시간으로 창작을 끝낸 후엔 안방으로 내려가 의기양양 자랑을 합니다.
모부들아! 라면서 요. 처음엔 잠깐 멈칫합니다. 이렇게 불러도 되나 의아해지죠. 몇십 년간 편견으로 부모님을 칭하는 단어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집에서 부모님을 한 번에 부를 때는 항상 "엄마아빠"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은 늘 아빠보다 엄마가 늘 먼저 나왔죠. 친정 집에 갈 때도 엄마집에 간다고 하고, 엄마 보러 간다고 했습니다. 한자로는 부모님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먼저 나오지만 우리는 늘 "엄마, 아빠"라고 엄마를 먼저 부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슬아 작가가 모부들아!라고 부르는 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말입니다. 오히려 현실에 입각한 적절한 단어 선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은 너무 재밌습니다. 끝나지 않고 계속 읽고 싶을 정도로요. 돈이 없어 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못했지만 상냥한 복희 씨와 문학청년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다사다난한 노동을 이어온 아름다운 웅이 씨는 훌륭한 모부입니다.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는 가녀장 슬아도 지독하리만큼 자기 관리의 끝판왕이고요. 이들이 모여 사는 낮잠 출판사의 일들은 보기 좋았다가 부럽다가 결국엔 웃으며 흘러갑니다.
그리고 저도 성공해서 엄마 아빠의 노후를 책임지는 가녀장이 되고 싶은 열망이 샘솟습니다. 엄마가 해주는 밥에 정당한 가치를 산정해 월급을 드리고, 재주 많은 아빠의 안전한 보호 아래 사는 삶을 그려봅니다. 내가 그들의 생활비를 대고, 그들이 나를 먹이고 고이고이 돌봐주는 꿈같은 생활을요. 그러려면 슬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요가를 하고 차를 마시고 매일 마감을 하고 어린이 글 수업도 하고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노래도 만들고 틈틈이 데이트도 할 만큼 부지런해야 할 텐데 말이죠.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삶이 저에게도 가능할까요.
한줄평 : 이거 연작이죠? 제발. 다음편도. 빨리. 빨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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