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개인주의자 선언
<개인주의자 선언>은 지금은 전직 작가이시지만, 당시엔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셨던 문유석 판사의 책입니다. 소년시절부터 책과 음악만 탐닉하던 개인주의자이며,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법관을 하며 느꼈던 일, 불합리한 일, 안타까운 일, 분노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글을 쓰셨고, 나와 상관없다 여기던 일들에 상처받고 눈물도 흘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하면서 결국 타인의 고통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하다는 게 무의미한단걸 깨닫게 되었기에 이 책을 쓰셨다고 했습니다.
책 속에 수시로 본인은 개인주의자다, 나는 이기적이고 무심하다고 자꾸 언급하셨지만, 누구나 다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아시는 휴머니스트로 보입니다. 글은 냉소적이다가도 따뜻하고, 직관적이다가 감성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독자를 격려하고 안아주는 따뜻한 책이더라고요.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집단주의는 불행하고, 개인주의는 행복한가를 생각해보면 너무 이분법적 논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인 사회에서도 행복한 나라와 불행한 나라가 있을 테고, 집단주의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불행한 이유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야박하기 때문도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미덕도 있을테고, 남과의 비교 문화도 심합니다.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고, 남부럽지 않게 혹은 남보다 잘살기에 집착합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강합니다. 어떤 유튜브에서 미국의 한 대학교 수업이었습니다. 학생들 자신에 관한 평가에 이야기하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가 나옵니다. 샘플로 뽑힌 동양인 학생은 중국인과 한국인이었고, 서양인은 미국학생 들이었겠죠.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느냐에 서양인들은 본인은 잘하고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동양인들은 잘하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성적은 동양인 학생들이 훨씬 높았습니다. 성적이 좋은데 왜 그런 대답을 했느냐에 대해 동양인 학생들은 나보다 잘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내가 1등이 아니니까. 나보다 똑똑한 학생이 있으니까. 나는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라고.
행복지수 역시 같은 상황일 것입니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기적의 나라.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성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나라.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릴 위험 없이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나라. 객관적 지표로는 상위 10퍼센트 내에 드는 장점이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왜 행복지수가 낮을까요. 본인 자신에 대한,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내가 사는 국가에 대한 평가가 야박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좋은 나라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최고가 아니니까요.
만약 행복함의 수치를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서 몸에 지닌 후에 체크해 본다면 우리나라 행복 순위는 상승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타인의 발견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제 아이만해도 친구와 외출을 했을 때, 친구가 배가 고파서 저녁을 먹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내 아이의 수중엔 돈이 없기도 했고, 배도 고프지 않았습니다. 이때 보통의 경우라면 친구의 몫까지 돈을 내주거나, 내 몫을 같이 나눠 먹거나, 그것도 아니면 같이 안 먹는 걸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습니다. 친구 혼자 저녁을 먹었고 본인은 옆에 같이 있어줬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많이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제 아이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돈이 없고 배가 고프지 않아서 안 먹은 거고, 친구는 배가 고프니 먹은 거라고요. 친구니까 친구가 밥 먹는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같이 있어줬다고. 도대체 그게 왜 이상하냐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게 왜 불편했을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단결, 협동에 관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개인의 잘못으로 단체가 체벌받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당연히 외워서 낭송해야 했습니다. 내용 역시 지금과 사뭇 다릅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조국에 몸과 마음까지 바쳐 충성을 다해야 했죠. 현제 맹세문은 2007년에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변경되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조국과 민족이 자유롭고 정의로운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요즘의 아이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시대상이 변하고, 국민들의 인식도 변해갑니다. 집단주의에 속해야 마음 편했던 시절도 지나갔습니다. 개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다릅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합니다. 내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대한민국이 즐거운 지옥이라면 북유럽은 지루한 천국에 가까운 듯하다.
즐거운 지옥과 지루한 천국 중에 어디서 살고 싶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천국이 좋을 것도 같지만,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처럼 행복하려면 즐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특성상 빨리빨리 일이 해결돼야 하고 기다리는 걸 못 참는다면 당연히 한국에서 살아야 합니다. 가뜩이나 지루한 천국에서 일처리가 더뎌 기다림의 연속이라면 버텨낼 수 있을는지.
제가 며칠 전에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해 면허 시험장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면허증 갱신 평일 대기시간 포스팅도 했습니다만, 12월에 사람이 많이 몰려 제 앞으로 대기가 거의 700명을 육박했습니다. 날짜를 빼고 평일에 겨우 방문한 거라 그날 모든 걸 해결해야 했습니다. 역시나 K-공무원은 달랐습니다. 시간당 200명씩 초스피드로 처리하더라고요. 6시 공무원 퇴근 전까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3시간 대기 끝에 무사히 갱신하고 나왔습니다. 만약 복지천국 북유럽이었다면 과연 그날 일이 처리되었을까요? 북유럽을 가보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들은 풍문에 의하면 불가능할 거라 예상됩니다. 저는 과감하게 즐거운 지옥을 택해서 자주 즐겁고 종종 행복하고 싶습니다.
한줄평 : 선언하고 말고도 없이 저는 이미 개인주의자입니다. 합리적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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